태그 보관물: 26

26살입니다.

“그래, 이번엔 내가 낼께.”

친구들끼리 뭉칠 때는 항상 돈을 들고 가지만 오늘은 돈 뽑는 걸 깜빡했다.

“어.”

돈 빌리는 건 싫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는 말도 안 했다.

담배 한 대 물고 집에 오는 길에 화가 좀 누그러지니 다시 그놈 생각이 난다.
스스로가 쪼잔하다.
그놈은 학점도 좋고 놀기는 또 잘 노는데 이는 질투심일 것이라.
그놈이 날 어려워 하는 것도 거기서 묻어나는 내 태도 때문일 꺼다.


오늘은 오후 수업만 4시간 반이다.
앞에서 교수님은 생글생글 웃으며 강의를 하고, 뒤에는 남자애 두 명, 한 명은 책을 보고, 한 명은 잔다.
웃고 있던 교수님은 듣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고, 난 멍하니 핸드폰을 꺼냈다.

듣기는 편한 수업이지만 지루하다.
핸드폰으로 별로 할 것도 없지만 앞의 교수님 얼굴보다 여기가 편하다.

3시간 수업이 끝나고 다음 시간 전에 잠이나 잘까 생각하고 엎드린다.


일어나니 강의실이 텅텅 비었다.
앞에서 같이 수업 듣는 여자애가 들어오길래 무심코 크게 물어본다.
조교랑 친한 애였지.

“오늘 휴강인가요?”

뒤에 같이 들어오던 남자애랑 얘기를 하고 있다.
그 말이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아챈 후에 날 쳐다본다.

그때 옆에서 “저기 칠판…”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텅 빈 강의실에 내 옆에 딱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앞 칠판에는 ‘유체역학 휴강’이라고 커다랗게 써져 있다.


“아…”

상황 파악을 하고 다시 물어본다.

“저번 시간에 휴강이라고 말했었나요?”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한다.

“아뇨. 오늘 조교가 들어와서 저거 적고 나갔네요.”
“감사합니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조금 발걸음이 가볍다.
나오면서 문득 범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한다.

“어, 형.”
“어 일하는 중이야?”
“어, 아 맞다 나 오늘 강남에서 저녁 먹고 들어갈 꺼야.”
“그래 알았다. 근데 방값은 어떻게 됐냐?”
“아… 지금은 못 부치는데…”
“그럼 집에 와서는 부칠 수 있냐?”
“어 되지.”
“그래 알았다 일단 내가 먼저 내 놓을께. 빨리 부쳐줘. 그거 내면 생활비가 없어.”
“알았어 형.”


동방에 가기 전에 지환이나 한 번 보고 갈까 하다가 그냥 동방으로 간다.
동방에서는 애들이 우루루 나오고 있다.

“뭐야, 왜 다 나와. 동방에 사람 없어?”
“어 우리 나가면 아무도 없어.”
“어디가, 도서관 갈 꺼지? 같이 가자.”

애들은 다 도서관 4층에 간다고 한다.
난 도서관 3층.

“아 맞다 오빠 6000원 드릴께요.”
“왜 100원 단위는 빼냐.”
“6000원 아닌가? 이상하네. 그냥 후배들 사주면 되죠?”
“아니 내놔.”
“나중에 드릴께요.”


전공책 빌리러 갔는데 없다. 하긴 내가 늦어서 다 빌려갔겠지…
왜 온 걸까 하고 다시 나온다.

과제가 많다.
내일까지 체분석 시험 결과.
아직 안 낸 부정정 구조물 해석.
프로그래밍 과제.


난 아빠가 그렇게 내 성적에 관심이 많았는지 미쳐 몰랐다.
늘 바위처럼 그 자리에 있던 아빠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날 설득했다.

집에 가면 공부가 거의 안 되지만 과제를 하려면 집에 가서 해야한다.

프로그래밍 과제는 벌써 끝내놨지만 아직 제출을 안 했다.
대학 와서는 모르는 걸 듣는 게 내 나름의 규칙이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신발을 벗으니 발이 차갑다.
조용한 방, 베란다에 나가서 담배 하나 꺼낸다.